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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괜찮은 하루> 베니의 구경선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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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의사에게 “당신은 곧 실명하게 될 겁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말일게다.
청각장애 2급이면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런 장애를 가진 이에게 의사가 “당신은 곧 실명하게 될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자살의 명소인 한강을 택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좁아지는 시야에 너무나 두렵지만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그이, 동화일러스트레이터 구경선 작가이다.
청각을 잃고 그림을 만나다
두 살, 열병을 알고 난 뒤 소리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말을 해보지 못한 딸의 혀가 굳을까 걱정돼 설탕을 입 주변에 발라 빨아 먹는 연습을 하게 했다. 계속 움직여야만 혀가 굳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자란 뒤에는 자음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어머니가 목소리를 내면 딸은 고사리 손을 어머니 목에 대고 울림을 느꼈다. 그러곤 제 목에 손을 대고 같은 울림으로 소리를 내며 말을 배웠다. 'ㅂ'과 'ㅍ'처럼 입 모양이 같은 입술소리는 어머니가 휴지를 입에 물고 떨리는 정도를 알려줬다. 어머니는 같은 방법으로 동화책의 문장을 가린 뒤 엄마가 읽어주는 입 모양을 보고 받아쓰게도 했다. 그런 노력 끝에 다른 사람들의 입 모양도 알아보게 되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수화가 아닌 구화로 말을 하고 듣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늘 붙어서 공부를 봐줬어요. 4학년이 돼서 혼자 공부할 수 있게 되면서 엄마는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어요.”
발음 연습은 평생동안 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도 며칠 말하지 않고 채팅만 하고 지내면 발음이 부정확해져 자주 말하고 계속 연습해야 한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려 할 때, 학교에선 특수학교에 보내라고 했다. 어머니는 발음훈련과 입술 읽는 법을 가르치며 딸을 일반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사춘기가 찾아왔을 땐 스스로의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피해망상이 생겼고 어두운 성격이 됐다. 애니메이션고를 중퇴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청기를 껴도 칠판에 필기를 해주지 않으면 수업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답답해서, 학교에 가는 대신 도서관이나 법원 같은 곳으로 ‘자율학습’을 떠났어요.”
학교를 중퇴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1년은 모든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온라인 게임 만 했다.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네일아트를 배워 미용실에 취직했는데, 듣지 못하니 대화가 될 리 없었다. 다른 직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다 쫓겨나다시피 그만뒀다. 할 일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말 대신 그림이 편했는데,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 ‘장애인을 위한 무료 예술 아카데미’를 진행했는데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때 과제중 하나가 캐릭터를 만드는 거였는데, 여러 그림책을 넘기다가 토끼가 보이는 거예요. 쫑긋하게 솟은 큰 귀 만큼 청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걸 알고 내 몫까지 잘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토끼 캐릭터를 만들게 된 계기입니다.”
듣고 싶어 그린 나의 분신, 베니
2008년, 때마침 ‘싸이월드 스킨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한 친구가 미니 홈피의 배경화면 그림을 파는 스킨숍을 하면 그림을 그려 돈을 벌 수 있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9개월 동안 매번 심사에서 떨어졌다. 인터넷 일은 사람들과 안 마주쳐도 가능했기에 부지런히 그려 올려서 드디어 스킨 작가가 됐다.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었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고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린 ‘귀찮아 토끼’, 그게 베니였다. 그 그림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때가 되면 의무적으로 그림을 올려야 하는데 너무 지쳤어요. 어느 날 토끼가 누워 있는 그림을 올리고는 '다 귀찮아'라고 달았어요. 이게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아요. 이때부터 인기가 좋았어요."
만들어낸 토끼 캐릭터 ‘베니’가 인기를 얻었다. 이후 그는 싸이월드의 ‘스킨숍 베스트3’에 올랐고, 디자인 요청부터 그림동화 출판제의까지 받았다. 동화작가 오선화와 함께 청소년을 위한 ‘힐링멘토’라는 책을 냈고, 배우 이세은과 ‘쎈과 베니의 사랑일기’라는 웹툰을 연재하기도 했다. 오랜동안 꿈이었던 어머니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엄마 사랑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수익금으로 청각장애 아이들의 후원도 하는 등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가슴 벅찬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3년여의 봄날 같은 행복은 짧았다. 싸이월드가 사람들에게 외면받으면서 한 달에 20만~30만원 수입밖에 안 됐다. 말 그대로 전업작가로서의 직업을 접어야만 했다. 장애인 생활 보조금을 알아봐야 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동사무소에 갔어요. 뇌성마비 여직원이 담당자였는데 그분의 삐뚤빼뚤한 입 모양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그러자 그분은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주어 써나갔어요. 절 도와주기 위해 진심으로 애쓰는 모습을 봤어요. 나도 이처럼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다. 출석교회에서 '내가 되고 싶은 나'라는 미술 선교 프로그램을 만들어줬다. 전 세계의 꿈이 없는 아이들을 만나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이다. 30개국을 목표로 삼고 재작년 9월, 네 번째 나라인 필리핀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야맹증이 심해지고 이유 없이 자주 부딪혔다.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개그맨 이동우 씨에 의해 알려진 ‘망막색소변성증’은 지름 10cm 내외의 좁은 관으로 보는 것 같다가 지름 5cm로, 급기야는 시력을 잃게 되는 병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경우는 청각을 잃고 시각도 잃는 ‘어셔증후군’. 1백만 명 중 1.8명의 확률로 나타나는 병으로 현재 치료법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됐어요. 청각 장애 하나에도 충분히 버겁게 살았는데, 왜 자꾸 내 것만 뺏어가는 걸까요. 왜? 어째서? 왜 나야? 대체 왜? 엄마를 보니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어요. 평생 엄마의 짐으로 살아가야 하나."
청각장애 1급, 시각장애 4급, 합쳐서 중복장애 1급이라니. 밤새 울었다고 한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첫눈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첫눈을 보니 이렇게 예쁜 첫눈을 아직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언제 시력이 완전히 사라질지 모르지만, 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자 생각했다.
8.8cm라도 볼 수 있을 때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앞으로 남은 시간에 꼭 해야 할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다. 작업실 갖기, 어머니에게 미역국 끓여주기, 돌고래와 헤엄치기,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기 등등이다. 버킷리스트 25개 가운데 15개는 완료했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미역국을 끓여드렸고, 혼자만의 작업실이 생겼고, ‘베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팬미팅’도 했고, 마라톤에도 성공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에세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출간했다.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일 말고 하는 일이 또 있다. 빛을 잃을 준비다. 일주일에 한 번 점자를 배운다.
“점자는 6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점이 워낙 작아서, 점의 개수와 모양을 촉감으로 구분하는 데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해요.”
밤에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을 한다. 망막색소변성증의 증상 중 하나가 야맹증이어서 그는 밤이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점자 연습할 때는 딴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지팡이를 짚으면서 걷기 연습을 하면 무섭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해요. 그럴 때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요. 미얀마에 맹화가가 있대요. 우선은 그 맹화가를 만나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보지 않고 그리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겠죠.”
요즘 그는 아침마다 거리에서 출근하는 사람을 지켜본다고 한다. 시력이 남아 있을 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그 이미지를 기억에 담아두고 싶어서다.
그는 자신의 책 <그래도 괜찮은 하루>에 이렇게 썼다.
‘소리를 잃고 시력을 잃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잖아요. 아직 기분 좋은 향기가 남아 있어요. 아직 제겐 많은 감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그림은 예쁜 선글라스를 끼고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척 꺼내 콧노래를 흥얼대며 걸어가는 ‘행복한 베니’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소리를 잃고 입모양을 보며 대화하는 오늘이 아닌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내일을 베니와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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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 봉사의 마음없이는 할 수 없는 직업, 요양보호사 | |  1. 엄마의 힘으로 리우올림픽을 가는 보치아 선수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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