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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이상권-밖으로 나오라 반드시 그곳엔 빛이 있다 프린트   
heemang  Email [2016-05-04 15:14:49]  HIT : 29  

밖으로 나오라 반드시 그곳엔 빛이 있다
우리를 위한 따뜻한 빛이 반드시 있다!

오늘은 1주일 만에 찾아온 ‘야구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오늘을 기다려왔다. 전화를 끊자마자 옷장을 열어 유니폼을 입는다. 왼손에는 야구공,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쏜살같이 집을 나선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런데 야구를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5살 때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이라 고교야구가 엄청난 인기였다. 이따금씩 친구들과 야구장에 가서 목청껏 응원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곤 했다.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어 아내와 결혼한 후 횟집을 차렸다. 워낙 부지런하게 일하던 우리 부부였던지라 횟집은 매일 저녁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매출도 급성장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부지런히 일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나는 나름대로 동네에서 알아주는 ‘횟집의 달인’으로 통했다. 사업이 흥하자 우리 가족의 삶은 보다 윤택해졌고, 그러한 삶 속에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는 맛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다.

1991년의 어는 날, 회를 나르던 나는 문득 눈이 전보다 나빠졌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두운 주방에서 회를 썰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안경을 써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이튿날 병원을 찾았다.

“진행성 녹내장입니다. 앞이 점점 안 보이실 겁니다.” 순간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는 것같았다. 아직 어린 내 자식들, 살아하는 아내, 연로하신 부모님, 잘 가꾸어온 내 횟집….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모든 것들ㅇ르 생각할 때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아닐 수 없었다. 병원을 나와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지탱해 나가야 하나’,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든 녹내장이라는 놈을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병을 거부할수록 시력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시각도 잃어 장애1급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눈을 비벼 보아도 이미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발버둥 쳤지만 그동안의 마음고생 때문이었는지 폐암까지 겹쳤다. 이젠 정말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횟집 사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기에 무기력하게 집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바깥공기라도 쐬면 울적한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위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걸을 때 주변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과의 외식도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생각에 꺼리게 되었다. 심리적 괴로움은 날로 커졌다. 무엇보다도 앞이 보일 때 식구들을 더 잘 챙겼어야 했다는 후회가 엄습했다. 그제야 지난 삶을 돌아보고 깨달았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아이들과 놀이공원에도 거읨 ht 가보았고, 아내와 쇼핑해본 적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가족들과 행복한 추억이라도 많이 쌓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나를 점점 괴롭게 했다.

밖으로 나가면 욕먹기만 하는 존재, 집에 있으면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만 하는 존재처럼 느껴져서 한시도 괴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도저도 할 수 없게 된 나는 결국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자 너무나도 괴로웠다. 누군가 나를 다시 살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살려만 준다면 다시 보람찬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식구들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게 준 또 한 번의 기회였다.

삶을 즐기는 것만이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지만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가야 했다. 그렇게 실로함 시각장애인 복지관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점자교육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난 시각 장애인들과의 첫 만남은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어 누가 누군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서로의 상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음으로 통하는’ 속 깊은 대화를 끄집어내면서 끈끈한 공동체가 되었다. 사회복지사분들도 절망적인 표정으로 복지관에 들어온 우리가 금세 친해져 그동안 감추어 온 웃음을 보이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했다. 실로암 복지관의 사회복지사 분들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려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주셨다. 그분들은 먼저 우리가 함께 산책을 하도록 도와주셨다. 모두들 바깥 공기를 즐긴 지 오래였던지라 손ㅇ레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면서 웃음꽃을 되찾았다.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은 점점 더 다양해졌다. 복지사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다양한 활동을 즐기면서 그동안 위축되어 있었던 우리는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복지사분들의 목소릴 통해 배트, 베이스, 투수 같은 친근한 단어가 들려왔다. 며칠 뒤 우리를 위한 야구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공도 안 보이는데 야구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용 야구가 있단다. 그리고 우리가 대한민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야구팀이라고 했다! 어릴 적 친구를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기분에 뛸 듯이 기뻤다. 우리에 대한 소식이 KBS<스포츠 뉴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 따뜻한 지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프로야구 박병호 선수가 일일 봉사자로 와서 타격 폼도 가르쳐 주었다. 존경하는 ‘야신’김성근 감독님은 친히 유니폼을 협찬해 주셨다. 게다가 많은 기업인분들이 고가의 장비를 제공해주어 이젠 웬만한 사회인 야구단 부럽지 않은‘제대로 된 팀’이 만들어졌다.

시각장애인 야구는 정상인들이 즐기는 일반적인 야구와 규칙과 장비 면에서 조금 다르다. 하지만 공을 잡을 때 손에 느껴지는 전율과 타격 순간의 쾌감만큼은 학창시절 즐겼던 그 느낌 그대로다. 야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겨울에도 주기적으로 만나 ㅎ마께 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을 하니 더 이상 겨울을 외롭게 지내는 일이 없어졌다. 야구 연습 후에 따뜻한 식당에서 몸을 녹이며 함께 마시는 막걸리는 정말 꿀맛이다. 얼마 전부터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우리는 야구장에 응원하러 가기 위한 표도 직접 예매할 수도 있게 되었다. 열정을 다시금 불태울 수 있게 해준 주위의 따뜻한 관심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이젠 세상사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오히려 더 행복하다. 내가 행복해 하니 가족들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 같아 삶에 대한 의지가 점점 더 살아나는 것 같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우리 팀이 아직도 전국 유일의 팀이라는 것이다. 아직 홍보도 부족하고 참가 인원도 저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꿈이 생겼다. 전국 유일 팀의 주장으로서, 여러 매체에 도움을 청해 전국 시각장애인 야구 리그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도 시각장애인 야구 국가대표를 꾸려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하고 싶다. 동시에 과거의 나처럼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장애인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장애인 동료 상담가로 활동하여 그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싶다. 다시금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말이다. 과거의 나와 같이 방에 처박혀 홀로 고뇌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전하는 말로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그대여, 방에서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용기 내어 밖으로 나와라!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
우리를 위한 따뜻한 빛이 반드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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