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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오상주-고난의 뒤를 돌아보며 프린트   
heemang  Email [2016-05-04 15:17:28]  HIT : 44  

고난의 뒤를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그때는 하나님은 제게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믿었다가 의심했다가 하느라고 저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 은혜를 깨달았으니 그 힘으로 앞으로는 더욱더 굳세게 기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사는 올해 17세인 정민혁<아이들의 이름은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했습니다.>의 엄마 오상주입니다. 아들 민혁(가명)이는 자폐성장애 1 급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올릴 이야기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친정엄마가 저를 낳자마자 아버지랑 헤어지게 되어 엄마랑 둘이만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자신의 고단한 삶에서 오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시고 하나 뿐인 저에게 화풀이하고는 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일마다 못마땅해 하시고  “너는 아무 것도 못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자연히 저는 성격이 위축되고 수동적인 성향으로 변했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아이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리 깊이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 나이 스물여덟 살 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주위 분의 중매로 선본지 5개월 만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딸 민희(가명)를 낳았는데 남편은 선천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것이 집안 내력이라며 참으면서 감내하라고 하셨습니다. 민희가 네 살 되면서 친정 엄마를 모시고 살게 되어 엄마는 사위에게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 받아서 사업자금을 대 주셨고 그러는 가운데 아들 민혁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남편은 밖으로만 돌았고 저하고는 물론 아이들한테도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민희와 네 살 터울의 민혁은 말괄량이이던 민희와는 달리 순하고 보채는 일도 없었습니다.  저와 가족들은 순둥이 아들을 낳았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민혁이는 생후 15개월이 지나도 옹알이만 나올 뿐 간단한 “엄마, 아빠” 정도의 의미 있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정엄마는 민혁이가 이상하다고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동네 소아과를 갔더니 의사선생님은 작은 병원에서 볼 사항이 아니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진료의뢰서를 써주셨습니다. 당시 민혁이는 원형탈모증처럼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세가 있었고 빙글빙글 맴도는 행동도 자주 보였습니다.  먼저 방문한 신경과에서는  정신과로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시고 낯을 가리지 않는 아이가  엄마에게는 편할 수 있지만 낯을 가리는 게 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빙글빙글 맴을 도는 것은 놀이가 아니고 물체가 지나가는 형체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정신병동에서 5일 동안 입원하고 검사한 결과 민혁이는 반응성 애착장애 즉, 자폐로 판정이 나왔습니다.  입원 기간 동안 저를 유심히 관찰하던 간호사의 권유로  저 역시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 결과 심한 우울증 판정이 나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아이 엄마가 그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신기하다. 엄마부터 살리고 보자.”라고 하셨답니다. 저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필 내 아들이 장애를 가진 아이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던 아이들 아빠는 “민혁이를 실수로 낳았으니 아무 책임감도 못 느끼겠다. 내 아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니 갖다 버리던지 알아서 해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엄마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으로 사업을 하던 아이 아빠는 3년 만에 부도를 맞았습니다.
저의 우울증 증세는 심해졌고 집안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친정엄마는 이러한 상황에서 저에게 “너만 우울증이냐 나도 우울증인데 넌 돈이 많아서 병원에 가서 약 사먹고 난 돈이 없어서 약도 못 먹는다.”하고 소리치며 저를 심하게 대하셨습니다. 남편의 무책임성과 잦은 외박을 저는 끝까지 견디지 못하다 교회 구역식구들의 6개월간의 작정예배에도 불구하고 저는 위자료는 상상도 못하고 이혼까지 이르렀습니다.  친정엄마는 평생 모은 재산을 사위에게 탕진시키고 돈에 대한 한이 늘어만 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고 매달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하나님밖엔 의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3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금식밖엔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해 공사장에 일을 하러다녔는데 돈도 많이 안 벌어온다고 그동안 민혁이를 돌봐주셨던 엄마가 갑자기 가출을 하셨습니다. 8월 달 휴가철에 저는 손발이 묶이게 되었습니다. 휴가철인 관계로 민혁이 다니던 어린이집은 방학 중이었고 구청은 짧은 시간만 맡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가야하는데 길을 막아도 이렇게 막으십니까.  살아갈 구멍은 열어 놓고 시련을 주셔야지요. 이제부턴 하나님을 떠나고 아이들도 교회에 안 보내겠습니다.” 저는 점을 보러 점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이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어요?” 하고 물으니 자기가 역술을 가르쳐 줄 테니 그 일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엄마 돌아오시면 설득해서 꼭 자기를 찾아오라고 수강료 받지 않고  가르쳐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돌아와야 했습니다. 깊은 신앙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부르며 살아온 저는 그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와서 어린 두 아이와 냉장실 냉동실을 열어 내용물들을 전부 끄집어 냈습니다. “민혁아 아직은 우리 먹을 것이 이렇게 많다. 굶어 죽지는 않겠다.” 이상하게 맥은 빠졌는데 굶어 죽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은 되지 않았습니다. 순간 떠오른 것이 선반위에 5년 전 엄마가 파시던 양말 재고 가방이었습니다. ‘8월은 너무 더워서 아이들이 더위 먹으니까 9월 찬바람나면 리어카 사다가 아이들 태우고 나가서 양말 장사를 하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가정방문 나오셨는데 그 선생님께 저의 계획을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러다가 부주의로 어린 민혁이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냐고 했습니다. 저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해봐야겠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형편을 보신 복지선생님은 우선 쌀값이라도 하라고 지원해주셨습니다. 5년 만에 양말가방을 열어보니 오래되어서 물이 다 빠지고 흰색은 검정색이 되고 스타킹은 낡고 해서 추려서 버렸더니 양말이 절반밖에 안되었습니다. 지원받은 쌀값을 가지고 저는 동대문시장 도매상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겁이 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장님께 “이 돈이 제 전 재산인데 양말을 못 팔면 돈이 양말에 묻히게 되는데 사장님이 팔릴만한 물건으로 골라주세요”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선뜻 골라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고난만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고 민혁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개학을 했고 엄마는 이모님 댁에 숨어 계시다가 돌아오셨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민혁이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이상한 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자기만의 틀안에서 놀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슬슬 피하며 민혁이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화가 났습니다. 어느 날 동대문 시장에 양말 사러 전철을 탔는데 잠깐 조는 사이에 어느 할아버지가 민혁이한테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녀석이 버르장 머리 없이 어른의 어깨에 마구 기대네!!” 평소에 민혁이는 할아버지나 아저씨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반가워서 한 행동인데 그 할아버지는 마구 윽박 질렀습니다. 저는 “죄송합니다. 아이가 장애아이라서 실수했어요” “그럼 네 새끼 네가 잘 데리고 다녀야 할 것 아냐!!” 저는 할아버지한테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식도 안 키워 봤냐고 키울 때 물그릇 한번 안 엎지르고 유리컵 한 개 안 깨봤냐고 할아버지 총각이냐고 전철이 울릴 정도로 소리치며 분노했습니다. 동대문시장에 도착해서도 민혁이는 양말 더미에 기어 올라갔습니다. 겨우 집에 돌아와서 밤새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숱한 냉대 속 에서도 민혁이는 주님의  은혜로 잘 자라주었습니다. 저는 착한 민혁이를 보면서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장사하면서 이 복음성가가사를 항상 부르며 살았습니다. 기도도 잊지 않았습니다. 기도 안하면 세상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할때마다 응답해주셨고, 저는 하나님 빽으로 천하무적이었습니다. 돗자리를 메고 가방 끌고 오전에는 신대방삼거리에 민혁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민혁이 맡겨놓고 근처에서 장사하다가 민혁이 수업마치면 싸가지고 화곡역사거리에서 동네 어린이집에 민혁이 맡기고 장사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열심히 일해서 동대문시장에 도매상을 여는 것이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합회회원이라면서 한 아저씨가 장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아줌마 좋은 말 할 때 장사 접어욧!!” “아저씨 다시 한번 말해봐요!! 여자 혼자 장사한다고 무시하는 겁니까!!” 그랬더니 두 명의 아저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자기네는 연합회회원이고 회비도 걷고 한다고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알겠다고, 그렇지만 일단은 오늘은 내가 나왔으니 오늘만큼은 장사를 해야겠다고 대항했습니다. 한풀 꺾인 그 아저씨들은 알겠다며 물러났습니다. 저는“날~사랑하심~~날~~사랑하심~~”찬송가를 부르며 화곡역 사거리에서의 마지막 장사를 했습니다. 나중에 그 연합회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구청에 고발을 하면 그 일대 노점상들이 일제히 장사를 못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연합회에 가입도 못합니다.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오전엔 신대방삼거리, 눈비와도 못하고 민혁이 치료 받는 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는 세상 물정을 한 가지 한 가지 알게 되었고 민혁이를 기도로 주님 안에서 더 잘 키우겠다고 다시 다짐했습니다.

화곡역에서 쫓겨난 저는 그동안 가입, 활동했던 인터넷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제 양말을 팔아달라고, 제 양말은 동대문에서 사다가 하나하나 제 손때 안 묻은 것이 없다면서... 5년만의 양말 물 들은걸 보고 물 빠지지 말라고 색깔별로 위생백에  포장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카페친구들이 저를 돕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민혁이를 데리고 오라는 곳은 전부 찾아갔습니다. 의정부 평택 수원 등등.. 그곳에 가면 양말을 팔아 주기위해 여러 명이 모여서 제가 오기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민혁이는 말은 못하지만 멜로디는 흥얼거립니다. 음악을 좋아합니다. 둘이서 전철을 타고 중창을 하면서 가면 너무 즐거웠습니다.

평화도 잠시 동안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는 집이 경매에 들어가게 된다는 통지서를 받게 되면서 저는 당황했습니다. 엄마가 얻어 준 전셋집은 저당 잡힌 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잠적했고. 전세 계약서에도 집주인이 아니고 대리인과 계약 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리인은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는 카페 친구들의 도움으로 집주인의 행방을 찾아 다녔지만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방 얻어서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가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내 아이들 볼 생각도 하지 말고 죽을 때 찾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웃 아주머니는 엄마 보고 그 집을 사라고 했더니 솔깃했는지 짐을 푸셨습니다. 저는 ‘엄마는 돈이라면 자식도 팔아 먹을 거야.’ 라는 생각에 슬펐습니다.
몇 개월 동안 공포감에 사로 잡히며 절망하던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영구임대 아파트가 있으니 신청을 하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동안 모아둔 사백만원을 가지고 수급자들만 갈 수 있는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일 하고 들어오면 엄마와 민희는 먹을 것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고, 그 화살은 제가 민희를 그렇게 키웠다며 저한테 돌아오고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엄마랑 헤어졌습니다. 가양동 영구임대아파트, 평수는 좁지만 보증금 싸고 월세도 싼 곳이라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2년 후 다시 시련이 왔습니다. 중2때 민희가 사춘기를 맞았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감겨서 교복을 입혀서 학교에 보냈습니다. 기도원으로 금식기도로 엄청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학교 안가고 떼쓰는 민희와 씨름 하고 견디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큰소리가 날 때마다 민혁이는 흥분을 하며 마구 마구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돌보는 게 너무도 힘들어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민혁이를 시설에 맞기라고 했지만 그럴 자신도 없었습니다. 민혁이를 버리면 벌 받을 것 같았습니다. 민희가 과연 유급을 받고 한 학년을 더 다니게 하면 그게 가능할까. 아니지 그럼 안 되지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저는 몰라요 알아서 해 주세요.” 모든 것을 포기하니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학년말이 되어서 반 친구들이 대표 두 명을 뽑아서 민희를 데리러 집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반 친구들이 민희가 며칠이나 결석하는지 세고 있었답니다. 유급 위기가 오자 “이러다간 안 되겠다 우리가 민희를 데리러 가자” 의논을 해서 대표 두 명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민희는 두 달 이상을 결석하고 친구들과 소식도 끊어지고 후회도 되고 하다가 못 이기는 척 학교로 따라간 것입니다. 무사히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저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가자고 해도 안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민희 다니던 중학교때 봉사활동 왔었던 언니가 주일날 아침에 자기 다니는 인천 작전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자고 민희를 데리러 왔습니다. 민희는 조그만 개척 교회가  맞는지 열심히 다녀서 저는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민희는 민혁이와 똑같이 해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머리 쓰다듬어 달라고 엉덩이 두드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놀려서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아침에 민희한테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옵니다. 돈이 없다고 하면 엄마한테 빌려 보라고 합니다. 요구를 거절 해 놓고 보복이 두려워 민희는 일부러 지각을 했습니다. 학교에 자퇴서를 내겠다고 해서 저는 3년 동안 학교를 드나들었습니다. 상담실로 교무실 담임선생님께  민희 좀 잘 봐달라고 사정사정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고맙게도 민희를 보호해 주시고 3년을 잘 마치게 해 주셨습니다. 민희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민희를 잘 다독여 주고 오르간 반주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잘 다니고 예배시간  반주고 하며 기도도 정말 열심히 합니다.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성공패키지에 가입했는데 지금 취업단계인데 취업이 잘 안됩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민희도 철이 들어서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기도를 들어 주시겠죠?

“우리가 환란 중 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말씀

생각해 보면 그때는 하나님은 제게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믿었다가 의심했다가 하느라고 저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 은혜를 깨달았으니 그 힘으로 앞으로는 더욱더 굳세게 기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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