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페이지
  희망방송로고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서 16장 3절
 
희망프로젝트
연말자선행사
희망을 노래하라
빛드림 프로젝트
찾아가는노래봉사
공연및행사이모저모
장애수기공모
사랑의 쌀 나누기
 
 
 
   
 
장애수기공모
 
[2015] 서정임-서원 프린트   
heemang  Email [2016-05-04 15:18:41]  HIT : 42  

서원(誓願)
 비록 아직까지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서원 기도로 태어난 아들이 주님의 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육체의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글을 쓴다면 그것 또한 값진 일이지 싶습니다. 아들이 살아있기에 같이 웃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앞으로 언제까지 주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간, 이 하루를 소중히 간직하며 저는 오늘도 교회에 가서 남편과 아들을 위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에 눈을 뜹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의 자세를 바꿔 주고는 캄캄한 길을 걸어서 교회에 갑니다. 탕자 같은 남편이 정신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과 아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집에 오면 서둘러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씻기고 아침을 먹이면 집 근처 초등학교에 통학버스 승차보조 일을 하러 가야 합니다. 19년 째 꼼짝도 못하는 아들을 침대에 눕혀 놓고 가야 하는 제 심정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제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것은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으나 신앙체험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성에서 목사님이 저희 교회로 부흥회를 오셨습니다. 성도들 모두 마가의 다락방처럼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어떤 사람은 예언의 은사, 방언하는 은사, 환상을 보는 은사 등등을 받았지요.
 저는 사람들보다 늦게 은사를 받았습니다. 부흥회가 끝나고 집에서 낮잠이 들었는데 난생 처음 듣는 우렁찬 목소리가 성경 에스겔 3장 3절 말씀을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 말씀을 듣자 눈물콧물이 흘러나오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했던 모든 것들을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참 기쁨이 넘쳤습니다. 저는 환상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은사를 잊고 지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낮에는 농사일을 도우고 밤에는 남포등을 켜놓고 비단 홀치기를 하며 혼기가 차서 스물여섯 살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선을 몇 차래 보았지만 다들 하나 같이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 남편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 말을 믿고 결혼을 했습니다. 시집에 갔는데 네 살 먹은 여자 아이가 달려와 제 다리를 붙들며 “엄마, 어디 갔다 왔어?” 하고 말하더군요. 저는 남편의 딸인가 싶어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시어머님은 그 아이는 아주버님의 딸인데 병(病)으로 돌아가셨고, 엄마(형님)마저 집을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조카를 친딸처럼 보살피다가 몇 년 후에 분가를 하였지요. 남편은 착실히 교회에 나가는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 갑자기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웃집에 사는 집사님이 어떤 일로 오해를 하여 남편에게 심한 말을 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남편에게 설득도 해보고 사정도 해봤으나 헛수고였지요.
 그 후로 남편은 교회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고, 제가 교회에 가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밤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싸우다 화해하기를 반복하다가 임신을 하여 딸을 낳았지요. 남아선호를 원했던 시어머님과 남편은 내심 서운한 기색을 보였으나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시어머니께서 미역국도 끓여주며 몸조리를 해주었습니다. 딸을 낳고 남편은 정신을 차리는 것 같더니 농사일을 하다가도 친구의 전화를 받으면 곧장 달려가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땅을 팔아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차렸습니다. 남편이 일을 저지를 때마다 뒤처리 하는 건 모두 저의 몫이었습니다. 남편 하나 믿고 시집을 왔는데 시어머니는 저를 구박하고 시집살이가 고추보다 더 맵다는 말이 실감 나더군요. 그럴 때마다 저는 교회로 달려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두 해가 지나고 또 임신을 했지요. 농사일을 하다가 갑자기 진통이 와서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집에서 혼자 냉방에 들어가 아이를 낳고 탯줄을 끊었는데 이번에도 딸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는데 또 딸이라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요. 입맛이 없어도 태어난 딸에게 젖을 물리려면 밥을 먹어야 했기에 한술 뜨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큰딸이 밥상에 있던 뜨거운 국을 엎지르는 바람에 배와 다리를 데여서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방문을 벌컥 열고는 저와 갓 태어난 아기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가시나를 냇가에 갖다버리라.”
 저는 그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배 아파서 낳은 딸을 버리라니요. 아무리 서운해도 그런 말까지 들으니 제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서 몇 날을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있는데 남편이 잉어를 구해 와서 가마솥에 푹 고아 주어서 먹었더니 한결 나았으나 그때뿐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 한다는 시어머니의 구박은 계속 되었고, 남편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밖으로만 나돌았습니다. 한나가 사무엘 선지자를 낳기까지 온갖 핍박을 참고 견디며 기도하던 것이 생각난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제발 아들을 주신다면 주의 종으로 키우겠습니다.’ 하고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삼년 만에 드디어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물론이고 남편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농사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주일을 지키며 학생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아들을 보면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남편과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제발 우리 아들이 많이 안 다쳤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들은 응급실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누워있더군요. 멀쩡하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은 사금파리로 긁는 것 같이 아파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크게 다친 것 같다며 당장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서 검사해보니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부러진 뼛조각이 혈관을 막아 왼쪽다리는 골수염이 되어 발가락부터 썩어 들어가서 급히 절단수술을 해야 했고, 목을 다쳐서 전신마비가 되어 두 번 다시는 일어나 두발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종으로 키우겠다던 저의 꿈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의 다리를 지켜주고자 의사선생님을 피해 다니며 수술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아들의 생명과 다리를 맞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들은 자신의 상태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저와 남편은 당분간 이 사실을 비밀로 했습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아들의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며 마비되었던 팔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침대에 앉게 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내 왼쪽 다리 어디 갔어?”
 저는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얘기 하였습니다. 아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더니 이윽고 식음을 전폐하며 죽으려는지 밥도 먹지 않고 눈을 감고 계속 잠만 잤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들이 죽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영양제라도 놓아달라고 부탁하며 하루하루 버티다가 다행히 아들은 충격에서 벗어나 죽을 먹으며 기운을 차렸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소변을 볼 수 없어 호수를 삽입하였고, 항문에 약을 넣어서 대변을 빼줘야 했지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호수가 막히거나 꼬여서 시간이 지체되면 혈압이 올라 온 몸과 얼굴에서 땀을 비 오듯 흘렸고,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때문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에서 돌봐주어야 했습니다.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혼신의 노력 끝에 아들은 혼자서 보조기로 밥을 떠먹게 되자 일어나 두발로 다시 걸어 다녔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교통사고 보상금은 병원비로 들어가더라도 제발 아들이 회복되기를 소망하며 2년 간 재활치료를 받았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어서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병원과는 달리 집에서는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습니다. 양계장과 농사를 짓는 남편의 일을 도우며 밥하고 빨래하고 틈틈이 아들도 보살펴야 했는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조류독감으로 닭들이 폐사하자 남편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이 모든 불행과 아들의 사고가 마치 제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탓하며 원망했습니다. 아들을 보살피는데 같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원망의 말만 퍼붓는 남편이 야속했습니다.
 남편은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날부터 연락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눕혀두고 남편을 찾으러 다닐 수도 없었지요. 빚쟁이들이 시시때때로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빌려간 돈을 빨리 갚으라며 윽박을 질렀고, 은행에서는 독촉장과 전화가 수시로 걸려 와서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결국 빚 때문에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도망치듯 한겨울 밤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날따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아 마치 우리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난방이 안 되는 좁은 집에서 문틈으로 외풍이 들어와서 뼛속까지 시렸습니다. 이불을 두텁게 덮어주어도 떨고 있는 아들을 보자 서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는 어떡하든 밥이라도 굶기지 않으려고 아들을 침대에 눕혀 놓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집과 밭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고, 가까운 초등학교에 보조급식원으로 취직하여 돈을 벌었지요. 덕분에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갔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보일러실에서 전기누전으로 불이 나서 집이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불이 났으니 도와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가 누워 있는 아들을 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이웃집에서 신고하여 소방차가 도착해서 불을 껐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 없이 집 전체가 불에 타지 않았으나 아들의 엉덩이에는 화상으로 인한 욕창이 생겨서 밤새 고열로 힘들어 했습니다. 아들의 고통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아들은 저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병원에 입원하여 욕창수술을 고민하던 중에 근처 교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엉덩이가 상처 없이 깨끗하게 되어 있는 환상을 저에게 보여주신 것을 믿고 저와 아들은 수술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다섯 번의 재수술을 받게 되었지요. 저는 과로와 피로가 겹쳐서 온몸이 쑤시고 칼로 뼈마디를 치는 듯이 아파왔지요. 감기약을 먹어도 좀처럼 낫지 않았습니다. 팔과 몸 여기저기에 물집이 생겨서 피부과에 갔더니 대상포진이었습니다. 혹여 아들이 걱정을 할까 아파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 넘게 꼼짝도 못하고 엎드려 있는 아들을 위해서 성경책을 읽어주고 찬송도 같이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신 대로 아들의 욕창이 깨끗하게 나아서 퇴원하여 집으로 왔습니다.
 아들은 장애 때문에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하며 시간을 허비하다가 성경을 읽고 시립도서관에서 보내준 책을 많이 보더니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대입검정고시를 보겠다고 밤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책과 씨름하더니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이버대학에서 4년 전액 국가장학금을 받으며 소프트웨어학과를 전공하여 올해 졸업을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졸업식에 참석하여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것은 이전에 흘렸던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딸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 하고 결혼하여 예쁜 손자손녀를 낳은 것도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장애인활동보조인이 아들을 잘 보살펴주어서 지금은 마음 편히 일하러 가고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고난 중에도 감사한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아들을 키우고 간호하느라 저의 청춘은 다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청춘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서른셋인 아들은 컴퓨터를 잘해서 자신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고, 아픔과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지만 정신은 온전하여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으면 합니다.
 비록 아직까지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서원 기도로 태어난 아들이 주님의 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육체의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글을 쓴다면 그것 또한 값진 일이지 싶습니다. 아들이 살아있기에 같이 웃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앞으로 언제까지 주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간, 이 하루를 소중히 간직하며 저는 오늘도 교회에 가서 남편과 아들을 위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 

     156. [2015] 배자경-장애인의 애환
     154. [2015] 손성일-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