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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서” 프린트   
희망방송  Email [2016-05-02 17:41:39]  HIT : 42  
한국사회에서 ‘홀트’는 하나의 상징이다. 전후(戰後) 배고프던 시절, 전쟁고아들을 미국으로 입양 보내 부모를 만들어 준 고(故) 해리 홀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 지난 10월로 60주년을 맞았다. 1955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에 처음 보낸 입양 1세대 17명이 중년의 모습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각자 사는 곳과 자라난 환경은 다르지만 뿌리가 같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한인 입양인들은 서로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그것도 그립던 고국 땅에서 이렇게 모이니 감개무량합니다."
수잔(Susan). 당시 네 살배기 아이였던 순금 씨가 미국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한국 전쟁 당시 고아로 버려졌다가 미국 가정에 입양된 수잔 순금 콕스(63) 씨는 자신을 '넘버 167'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통산 167번째 어린이라는 뜻이다.

"혼혈 고아였던 내가 가정을 만나면서 비로소 평범한 삶을 살게 됐어요. 가정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 권리를 갖게 해주자는 게 입양의 취지입니다."

미국인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한 그는 학업을 마친 뒤 24살이 되던 해부터 미국 내 해외입양기관인 홀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새 가정을 찾아준 입양기관이다. 그는 83년부터 홀트의 공공정책 담당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입양 아동이 적응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 해외에 입양됐던 사람들일 겁니다. 입양으로 새 삶을 살게 된 내가 예전의 나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해야할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일을 시작했어요."

수전 콕스 씨는 한국 아기들의 해외 입양이 시작된 그 해에 미국으로 이주한 '입양 1세대'다. 그는 자신과 같은 1955~1960년 사이 미국으로 입양된 '1세대 입양인' 17명과 그 배우자 22명과 함께 지난 10월 12일 고국을 찾았다. 자신들을 입양했던 미국인 홀트 부부가 세운 홀트아동복지회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해외입양 프로그램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국제사회봉사회(International Social Services)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국 여성과 유엔군 병사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들에 대한 긴급 대책이었던 것. 이어, 홀트아동복지회가 사업을 시작했고, 미국 의회에 압력을 가해 대규모의 국제 입양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세대 입양 한국인들은 아직 미국의 몇몇 주에서 아시아인들의 이민이나 국제결혼을 허용하지 않던 시기에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독일, 캐나다, 스위스,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영국, 뉴질랜드 등으로도 한국 아동들이 보내졌다.
홀트아동복지회는 1955년 미국인 홀트 부부가 8명의 전쟁고아 입양을 계기로, 이듬해 1956년, 직접 한국에 들어와 전쟁 고아들의 해외입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설립되었다. 2000년부터는 창설자 해리 홀트의 둘째 딸인 말리 홀트(Molly Holt) 여사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홀트 여사는 스무 살이던 1956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와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60년 가까이 한국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현재는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인들과 생활하고 있다. 홀트아동복지회가 60년 동안 국내외에 입양을 보낸 아이는 모두 9만 5천여 명에 달한다.
지난 10월 홀트아동복지회 60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1세대 입양인들 모두는 홀트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심지어 이 중 절반은 성인이 돼 다시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 '양부모'가 됐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을 찾은 이유에 대해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서"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 동대문 근처에서 살다가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스티븐 대처(64·전성희) 씨는 "다섯 살 때 미군이 주는 사탕과 초콜릿을 받기 위해 트럭 뒤를 쫓아다니던 기억이 난다"며 "주한미군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내가 기억하는 허름한 풍경은 없어졌지만, 예전보다 잘살게 돼 감격스럽다"고 했다.

수잔 콕스 씨처럼 275번의 꼬리표를 달고 1955년 미국으로 입양된 킴 리(62·강영희) 씨는 결혼 후 입양한 한국인 아들 앤드루 리(25)와 함께 고국을 찾았다. 그는 항공 승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하고 1984년부터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들을 맞이하는 자원봉사를 해왔다.

네 살 때 찍은 사진을 붙여 신문에 광고를 낸 끝에 지난 1992년 가족을 다시 찾은 수잔 콕스 씨는 이번에도 남동생 가족을 만날 계획이다. 가족을 찾을 당시 그의 어머니는 이미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뒤였지만 마흔 살 생일 때 이름을 수잔 순금 콕스로 바꿨다. 수잔 콕스라는 영어 이름 사이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한국 이름 순금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입양인들이 모두 수잔 씨처럼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타마라 크라스케(56) 씨는 친모를 찾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를 찾진 못했지만, 지금은 매순간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고 나 역시 한국에서 아이 둘을 입양했다"면서 "그냥 어머니가 잘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들 모두는 친부모와 한국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서운함은 전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잘사는 한국을 보니 자랑스럽고, 자신을 낳아준 사람과 태어난 곳을 찾는 건 인생의 비어 있는 퍼즐 한 조각을 맞추는 것 같은 일이라고들 했다.

말리 홀트 여사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을 가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제 홀트아동복지회의 남은 과제는 해외입양보다 국내 입양을 늘리는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피부색이 같은 부모를 갖도록 하는 국내 입양이 아이들의 정체성 확립과 행복에도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가정은 후천적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입양 1세대들. 겨우 말을 뗄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 환갑을 넘긴 이들이 한국을 찾은 이유가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서"라는 말이 여운을 깊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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