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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의 시 산책
 
북한산에 올라 프린트   
희망방송  Email [2016-11-02 11:32:27]  HIT : 78  

 

매주 일요일 나는 북한산에 오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산을 오르다 보면 삶의 검불들이 하나 둘씩 몸을 떠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산을 오를 땐 되도록 말을 아낀다. 오로지 몸의 기능에만 충실하려 한다. 산길을 한 마리 하찮은 갑충이 되어 헉헉, 숨차게 오르면서 나는 지난 일과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밀린 숙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모든 사유는 몸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건강한 사유일수록 그것은 건강한 노동과 상관성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몸을 부리지 않고 나오는 생각은 현실성이 적을 뿐 아니라 부실하게 마련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산은 여러 형상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와 법도를 말해준다.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것. 급할수록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돌아서, 돌아서 가야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을 지혜롭게 경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산은 우회의 길로써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람에 따라서는 묵직한 바위의 형상에서 의연한 생의 의지를 읽는 이도 있을 것이고, 한 그루의 청청한 나무를 보며 당장의 이해타산에 눈이 먼 나머지 소탐대실의 어리석음을 거듭 범하는 현대인의 이기를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동화된 관습적 인식을 버리고 다른 각도에서 사물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가령 바위를 정적인 고정불변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물로 인식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바위를 가만히 눈 여겨 보면 그 견고한 표정 사이사이에 여러 겹의 주름이 있고 틈이 나 있기도 하고 더러는 이끼가 껴있기도 한데 나는 그것들을 바위의 활동하는 양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무, , 풀과 더불어 바위 또한 살아 움직이는 활성의 존재로서 그 생의 흔적을 그렇게 틈이라든지 주름이라든지 색깔 등속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엉뚱한 나의 생각이 산행의 노고를 덜어주기도 하는 것이어서 나는 좀처럼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산을 자주 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산은 언제나 정상에 오르러서야 사랑과 용서의 길을 일러주지만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그 길이 생각과 다르게 얼마나 숨차고 벅찬 일인지를.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이 아플 때 화를 내기 전 생각에 잠길 필요가 있다. 혹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지나 않는지, 혹 내가 산 아랫마을에 두고 온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여직 너무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산길을 오를 때는 돌멩이 하나 나뭇가지 하나에도 다 나름의 뜻이 있다는 것을 나는 매번 느낀다.

 

산길을 오르다가 두세 번은 쉬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나는 버릇처럼 저 멀리 잠시 비워두고 온 저잣거리를 되돌아 본다. 그러면 내 걸어온 생의 등고선이 손에 잡힐 듯 부챗살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멀수록 넓고 편해서 보기에 좋다. 그 만큼 먼 과거일수록 집착과 미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얼마 전 나는 캄보디아에 있는 세계 최대의 사원인 앙코르와트에서도 충분히 실감한 적이 있었다. 돌마다 새겨진 제국의 영화와 패망을 책으로 읽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직선의 시간대가 아닌 하나의 원 안에 다 들어있다는 생각. 서울과 다른 시간대를 완보하여 우리는 지나치게 과장과 엄살에 시달려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등을 두서 없이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다. 시간의 개념이 절대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캄보디아와 서울의 시간대가 다르듯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의 시간대를 각기 다르게 지니고 산다. 산은 우리에게 천천히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보폭이 빠른 자는 주변에 핀 꽃이며 풀의 상태를 살필 겨를이 없다. 산에 와서조차 서두르는 이를 종종 보게 되는데 참으로 그것처럼 안쓰러운 일도 없다. 정상에서 내 살아온 삶의 등고선을 천천히 바라다보면 부질없이 몸과 마음이 부준했던 어제의 일들이 까닭 없이 부끄러워져 얼굴이 팔월 염천 냇가에 놓인 자갈과도 같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삼 생각해보면 삶이란 기다림에 속고 울면서 조금씩 산을 닮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오르는 땀줄기가 등허리에 물고랑을 이룬다. 손으로 그것들을 훔쳐내면서 잠을 설치게 했던 애증이며 집착을 떨구어 낸다.

 

내 마음이 한없이 가난하여 산 속으로 동냥을 떠나면 산은 갈때마다 인자한 보살이 되어 내게 그 많은 삶의 양식들을 아낌없이 퍼부어준다. 산은 악기가 되어 귀를 즐겁게 하기도 하고, 엄니의 두툼한 손이 되어 쓰린 배를 슬슬 문질러 주기도 하고, 산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이 되어 괜찮다며 처진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한다. 그러나 산이 매번 인자한 생의 부모로서 나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산은 내 삶이 정직하지 못할 때 회초리되어 종아리를 아프게 하기도 하고 죽비가 되어 등허리를 따갑게 하기도 한다.

 

엊그제 일요일 북한산은 생강나무며 진달래며 개나리가 봉오리를 터드려대기 시작했다. 꽃 피는 것을 보면 자못 엄숙해지고 그것에 대해 외경심을 느끼게 된다. 꽃은 그냥 꽃이면서 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꽃이야말로 우주 그 자체다.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꽃나무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다 아는 것처럼 꽃나무 하나가 일가를 이루는 데도 우주 안의 삼라만상의 참여가 필요하다. 적당한 햇살과 별과 달과 바람과 습기와 흙의 자양이 골고루 필요한 것이다. 어느 하나 불충분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꽃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어찌 경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꽃 중에도 산 속에서 만난 꽃이 더욱 유별나게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땀 흘린 끝에 만나는 꽃이라서일까. 꼭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정원에서 가구는 꽃은 사람의 힘이 보태진 것이지만 산 속에서 핀 꽃은 저 혼자 우주의 교감과 조응 속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 속에 핀 꽃을 보며 새삼 말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저 온몸, 온 생으로서의 언어인 꽃 앞에서 그 무슨 같잖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꽃 피는 속도가 6세 어린이의 보폭과 같다 하니 이제 며칠 후면 만산홍화로 전국이 후끈 달아오를 것이다.

 

햇살이 다녀갈 때마다 폭죽처럼 터지는 꽃의 화염 앞에서 구질구질한 일들은 훌훌 날려 보내자. 마음에 낀 두꺼운 먼지도 깨끗이 씻고 생의 초심으로 돌아가도록 하자고 나는 산을 내려오면서두 주먹을 불끈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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